저널_18_05_기숙사 생활의 문화적 장벽 넘기
우리 가정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만 자란 두 자녀를 데리고 인도네시아에 와서 10년 간 사역을 해왔다. 한국을 떠날 때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만으로 7살과 5살이었다. 7살 짜리 큰 딸 아이는 한국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한 학기 경험했지만, 5살짜리 아들은 한국에서의 학교 생활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선교지로 오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얼마 동안 홈스쿨링을 하고 약 6년 전부터 기숙사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지낸 두 번째 학기에 큰 아이에게 기숙사 부모와의 사이에 오해로 인한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기숙사를 나와야만 했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성숙하고 학교의 상황도 좋아져서 다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아내도 내가 사역을 하는 곳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고 있다.
부모들이 선교지 사람들과 문화적 장벽을 넘기 위한 갈등을 하는 동안 자녀들은 그들 나름대로 학교(대부분의 선교사 자녀들이 아직도 한국어로 공부하는 학교가 아닌 외국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가정하여)에서 또 다른 문화적 장벽을 넘느라 고생들을 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선교지로 온 것은 다행스러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자녀가 사춘기의 나이에 선교지에 오고, 또 기숙사에서 새로운 적응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많은 서양 기숙사 부모들은 아시아 MK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수평적 사회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연장자에 대해서 특별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한국적 문화에 매우 낯설어 하는 것같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겨우 한 두 살 밖에 안되는 아이들 사이에서 조차도 존칭을 써야 하는지, 반말을 써야 하는지를 결정을 해야 하는 수직적 인간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영어를 쓰는 학교로서 학교 내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학교 내에서 한국말을 한 마디만 사용해도 벌(detention)을 받았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는데, 언니, 오빠, 누나, 그리고 형의 호칭은 허용되었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나도 서로 이름만 부르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것만도 대단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약 6년 전, 우리 아이들이 처음 기숙사 생활을 하던 학기에 있었던 일이다. 한 학기가 끝나는 날 인사도 할 겸해서 기숙사를 방문했다. 화란인 기숙사 부모는 우리 아이들이 학기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다만 우리 딸아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우리 딸 아이가 이야기를 꾸며 대었다며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고쳐 주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우리 아이의 나쁜 습관을 고치고 싶었고, 그래서 혹시 어떤 경우에 그러더냐고 물었다.
그 기숙사 부모의 설명은 이러했다. 하루는 화장실에서 우리 딸아이보다 한 살 아래인 한국 여자 아이가 수건 걸이에서 수건을 꺼내다가 잘못해서 수건 걸이를 벽에서 빼어 내고 말았다. 기숙사 부모는 이미 아이들에게 수건을 뺄 때는 위로 들어 올려서 수건걸이가 벽에서 빠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준 형편이라서 이 아이는 야단맞을 것을 생각하고 울상이 되어 있었다. 이때 우리 딸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기숙사 보모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건걸이를 떨어뜨린 아이를 야단을 치려고 하자 우리 딸 아이가 자기가 했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야단이 우리 딸 아이에게 떨어 지는 것을 보고, 잘못을 한 아이가 울면서 다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사실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단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이 일이 일어 났다면 우리 딸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혼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듣고 그 기숙사 부모는 새롭게 한국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면서 기뻐했다. 이 사건이 생긴 후부터 그 기숙사 부모와 우리 사이가 가까와 지게 되었고, 그들도 아시아 사람을 더욱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숙사에서 흔히 일어 나는 또 한가지의 일은 음식에 대한 태도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자녀들이나 손님이 오시거나 할 때 푸짐하게 차리는 등, 음식에 대해서 매우 너그러운 편이다. 나도 어릴 때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음식을 만들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푸짐하게 만드셨다. 그러나 서양 사양들은 식탁에 앉아서 먹는 사람의 양만큼만 준비한다. 특히 메인 디쉬(main dish)의 경우는 잘라서 그릇에 담겨 나오는 양의 한 덩어리(piece)가 대개 한 사람 양이다. 이런 것을 잘 모르는 한국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나오는 음식 중에서 실제로 가져가야 할 자기 양보다 더 많이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한국 학생들을 잘 모르는 어떤 기숙사에서 고기를 정량보다 더 가져간 아이들에게 벌로 한 주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실은 한국 부모쪽에서 이런 일을 미리 오리엔테이션해 주었거나, 아니면 학교의 기숙사 부모가 그것을 큰 문제로 삼아서 벌을 주기보다는, 한국 아이들을 불러서 차근차근 설명만 해주어도 해결되었을 것이다. 또 이런 것을 모르는 한국 부모들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벌 주었다는 것 때문에, 그것도 음식을 가지고 그랬다며 내심 노여워 하게 되었다.
학교와 가까워지기
이러한 문화적 방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들이 학교 선생님들과 가깝게 사귈 필요가 있다. 선생님들이나 기숙사 부모들은 아주 헌신된 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아시아 사람들을 나쁘게 대할 이유가 없다. 한국 부모님들은 대부분 공교육에 자기 자녀들을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선생님들을 친구처럼 사귀는 것을 어색해 한다. 그러나 외국의 선생님들은 부모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실한 태도와 성의 있는 몸짓은 언어보다 더 강력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녀들이 기숙사에 있지 못하게 되어서 아내가 학교 가까이로 이사하고 그래서 기숙사 부모와 학교 선생님들을 사귀게 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생각한다. 그 중 어떤 분들은 우리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넘어서 사역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사역을 위해 때로는 강사로, 혹은 책이나 기물을 증정하는 동역의 차원으로 발전한 적도 있었다. 학교가 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성탄 행사, 바자회 등에 참석하면서 한국 사람 대로의 문화와 전통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 진다고 생각한다.
자녀들을 준비시키기
자녀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서양과 동양의 문화 차이, 혹은 한국 사람들의 독특성 등을 미리 설명해 주어서 자녀들이 초기에 불필요한 문화충격을 줄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한국 부모들은, 특히 선교 단체가 운영하는 경우에는 학교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믿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순진한 믿음이 문화적 차이도 극복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 때문에 초기에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 자녀들은 시간 약속하지 않고도 친구네 집을 방문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경험한 많은 서양 부모들은 자녀들이 노는 것도 미리 사전에 부모들 사이의 동의가 있고, 또 교통편은 어떻게 할 것인가도 부모들끼리 미리 이야기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문화에 대한 지식이나 메너를 익힐 수 있도록 부모들이 오리엔테이션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기숙사 부모
OMF에 소속된 스위스와 독일 선교사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숙사를 가지고 있고, 그곳에는 자국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기숙사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능하면 한국인 기숙사 부모가 있는 기숙사를 선교사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자유롭게 서양의 문화에 접하지만 기숙사에서는 한국인 부모 아래서 한국의 문화와 정서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기숙사 내에서의 불필요한 문화적 충격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모를 떠나 있으면서도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좋은 여건의 교육환경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녀들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