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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_19_03_“당신의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부모 선교사의 글

큰아이 영찬이가 걸음마를 배우던 1987년, 한국선교훈련원(GMTC)에 있으면서 한 자녀교육 세미나에 참석하였었다. 세미나에서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앉아있는 우리 부부 사이를 기어다니던 영찬이를 놓고 ‘나중에 이 아이의 교육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현지학교, 선교사자녀 학교...?’ 하면서 실감나지 않는 결정을 미리 해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92년, 4개국에 걸쳐 2년간의 훈련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가 들어온 지역은 막 문이 열리기 시작한 구소련의 한 나라였다. 그간 영어권에서 지내온 터라 아이들이 영어에 익숙하고, 특별히 큰아이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하였지만 이 나라는 전혀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만 6살 된 큰아이는 현지학교 1학년에, 밑에 두 아이는 현지 유치원에 들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인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현지학교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냥 열린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걸어갔다고나 할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국을 떠날 때부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갖고 온 소신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국어인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우선으로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러시아어를 빨리 배워 학교공부를 잘 따라하게 하는 것보다는 한국말이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더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았던 지역은 한국 가정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곳이었기에 사방을 둘러봐도 한국말로 말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아이라고는 우리 아이들뿐이었기에 다행히 학교측에서나 유치원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 반에 아이들을 넣어주었다. 게다가 교육비라는 것이 없어 공짜로 공부하며 유치원에서는 점심까지 먹여주니 ‘이 나라에 큰 은혜를 입는구나!’ 하며 송구스럽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또한 선생님들은 크리스천들은 아니었지만, 이삼십 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어서 나름대로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반적으로 아이들을 잘 다루고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들이 더듬거리는 말로 열심히 공부를 따라하려고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기에 아이들은 기를 펴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학교에는 고려인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국말을 들으려고 우리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한국말을 시키며, “우리 아들은 머저리여. 자비나라(자기나라) 말도 못하고 남의 말을 하니...” 하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였다.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잘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를 강하게 심어주신 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나라가 구소련에서 독립하여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이 되면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시설 면에서나 교재조달 면에서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이 되면 난방이 잘 안되어 교실이 몹시 추웠고, 공부하는 책들도 귀하여 10여 년 전에 나온 책들을 사용하였다. 자주 등장하는 레닌의 사진들은 흰 종이로 안보이게 덮어가야 했고, 책에 낙서를 하거나 찢으면 선생님한테 심하게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또한 턱도 없이 적은 월급을 그것도 제 때에 받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서서히 가르치는 의욕을 잃고 살기 위해 시장으로 나가 앉았으며, 사회체계가 바뀌어 가는 과도기를 당하여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가야할 방향을 잃고, ‘돈이 최고다'라는 사고방식에 젖어들어 가는 모습들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면이 현지학교에 아이들을 보낸 우리를 갈등하게 하였고, 부모인 우리가 그런 부분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게 해 주었다.

세월은 어느덧 흘러 큰아이가 8학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자 학과목이 18개로 늘어 이 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 등 한국아이로서는 배우기 어렵고 또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과목들도 몇 과목이나 추가되었다. 게다가 과목들의 수준도 갑자기 올라가 따라가기가 벅찼다. 초등학교 과정까지는 집에서 부모가 한국 교과서를 가지고 같이 병행 해 주었지만 중학교 과정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학습을 러시아어로 해야하느냐, 아니면 한국어로 해야하느냐는 결정을 내려야만했다. 영찬이는 일단 러시아어로 하는 것을 택하고 현지 선생님들로부터 개인적인 보충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힘겹기는 하나 많은 진보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 공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저녁 1-2시간은 한국 국어, 수학, 역사, 지리 등으로 씨름하는 시간을 빼먹지 않고 있다.

캄캄한 곳에서는 조그만 촛불도 빛을 발하듯 현지학교의 어두운 상황에서 예수의 사람인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주위를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해주기를 소원해 왔다. 그래서 날마다 아이들을 주의 훈계로 가르치고 또 학교와 학교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역할을 우리가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요즈음에는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감사의 표현을 듣곤 한다. “당신의 아이가 우리 반에, 우리 학교에 오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좋은 모본이 되고 있다" 라고.

우리 가정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온 사역지에서 우리 아이들이 현지사람들과 그들의 말로 깊이 어울리며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너무나 자연스럽고 귀하다. 이 아이들의 생애에 보석처럼 빛날 "의미 있는 타자"인 현지 선생님들, 이웃들, 친구들과의 관계는 아이들이 점점 자라가며 더 깊은 데로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당신의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맑고 친절하고... 당신의 아이들과 가정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만이 아닌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계신 것을 진하게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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