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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_19_05_파란 눈의 진짜 한국 아이들

특별 기고

* 이 글은 수원 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부인이신 트루디 김 사모님께서 영어로 쓴 글을 한글로 번역, 요약한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소도시 상황에서 자녀들을 현지학교로 보내면서 교육적으로 양육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남편과 나는 1959년 12월, 기독봉사회 소속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한국에 온 첫해는 남편의 큰형님 댁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는 시어머님도 계셨고, 조카들이 9명이나 되었다. 그 집은 수원 시외에 있는 조그만 초가 농가였다. 우리가 큰형님 댁에서 산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남편은 어릴 때 미군이 미국으로 데려가서 공부를 시켜주었기 때문에 9년이나 집을 떠나있었다. 우리의 첫 선교지는 바로 남편의 집안이었는데, 그 당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목적은 내가 시댁에 살면서 한국 풍습과 언어를 배우고, 남편의 가족들을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그 집안에는 조카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시댁은 내게 훌륭한 언어학교가 되었다. 나는 도착한 첫날부터 환대를 받았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눈짓과 집안에서의 섬김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했다.

우리가 첫아들을 낳을 때쯤 해서 큰형님 댁에서 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우리 집을 지었다. 그 외에 다른 형제들과 누이도 우리 집에서 다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1966년, 우리는 미시간에 있는 친정 집에 몇 개월 간 다녀왔다. 그 후 첫아들 요셉이 수원에있는 인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에는 수백 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요셉이의 친구는 별로 없었다. 요셉이도 자기가 또래 한국 아이들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의 일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 반에 우리 아들이 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 반에는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여선생님은 아이들을 잘 통솔했고, 수업시간이나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나는 학교 첫날 그 선생님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후로 자주 학교를 방문했다. 나는 학부모 회의에 빠지지 않았고, 운동회나 소풍과 같은 학교의 특별행사에도 꼭 참석했다. 그 선생님은 내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초등학교 6학년 교사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그 반에 들어가 선생님을 도우며 관찰하는 것에 대해 마다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아주 유능했고, 자기 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는 사랑스런 분이셨다. 게다가 우리 아들 죠(요셉의 애칭)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다른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여 2학년과 3학년 때에도 죠가 계속 그 반에 있게 했다. 죠는 그 선생님 반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학교 성적에도 많은 진보를 보였다.

우리 딸 애설(메리케이)도 1969년에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친구를 잘 사귀고 오빠와 함께 학교 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인 요한이도 미처 다섯째 돌이 돌아오기 전인 1972년에 입학을 했다. 이웃에 함께 놀던 아이들이 모두 요한이보다 한두 살이 많아서 다 학교에 갔기 때문에 요한이도 그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서 허락을 해 주셔서 입학은 했지만 아직 학교 갈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는 힘들어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했지만, 운동에 관한 한은 항상 잘해 내었고, 수원시 또는 경기도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요한이가 참여하는 모든 운동대회에 참석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들이 우리 아들 요한이의 운동 시합을 볼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다! 그것이 요한이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던 것 같다.

한편, 요셉과 애설이는 음악과 글짓기 대회에 나가곤 했다. 애설이는 피아노를, 요셉은 트럼펫을 배우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모든 한국 아이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공립학교 교사들은 아주 신실하게 이런 과목들을 커리큘럼 안에 포함시켰다.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균형 잡힌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방학을 이용해서 미국의 또래 아이들이 주로 읽는 책들을 많이 읽어주었다. 아이들은 오전에는 동네 친구들과 놀았지만 점심 먹은 후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내가 책을 읽어 주는 것을 듣곤 했다. 영어의 지식은 책을 읽어 주는 동안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1966년에 캐나다 선교사 한 가정이 수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아이가 네 명 있어서 우리 아이들과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그 아이들은 서울 외국인학교로 통학을 하곤 했지만, 남편과 나는 우리 아이들이 걸어서 학교에 가고, 동네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며, 남편이 목회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더 좋게 생각했다. 남편이 수원 시내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이 지역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주일학교 활동에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을 가장 전인적으로 기르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것은 또한 아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하도록 불러 주신 곳에 대한 소속감을 더해 주었다. 아이들은 우리 팀의 아주 중요한 일부였다. 그들은 한국의 문화, 언어, 우정, 소속감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워갔다. 동시에, 그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영국과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더해 주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부요한 문화적 자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공립 중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들은 학교생활을 즐겼고, 또 모범생이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학생부에서 활동하고 여름과 겨울 캠핑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네비게이토에서 훈련하는 성구 암송도 했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사실 수년 동안은 우리 집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게다가 1960년대에는 낮 시간에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이 없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좀 자라면서 우리는 TV를 샀고, 토요일에 한 두 시간 만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도록 허용했다. 우리는 스테레오를 통해 클래식과 크리스챤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매일 성경을 같이 읽고 기도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모든 결정에 대해 함께 기도했다.

이윽고 아이들은 대학에 갈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미국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보내기로 하였다. 큰 애 둘이 대학을 갈 때 셋째 요한이도 같은 대학 내 고등학교 10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요셉은 트리니티에서 기독교 교육학 박사를, 애설이는 피아노와 종교 음악 석사를, 그리고 요한이는 롬바드의 노던 침례신학원에서 신학 박사를 받았다. 두 아들은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와 목회를 통해 주님을 섬기고 있고, 딸은 미국에서 결혼하여 현재 기독교 계통의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9명의 손자, 손녀들이 있는데, 그 애들 모두 한국 학교에 다니고 있고, 이중언어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크리스챤의 삶을 경험을 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우리 팀의 중요한 일원이라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은 그 분을 위해 다 함께 아름다운 증거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 가족에게 주셨다. 주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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