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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_19_06_어둠 속에서 자라는 우리의 빛나는 딸들

번역글

* 이 글은 ACSI 기관지인 ‘Interact' 2001년 5월호에서 발췌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 에밀리 반 달렌과 남편 프랭크는 미국 콜럼비아에 살면서 장로교 개혁파 선교단체인 ‘World Witness’ 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들을 1986년부터 1998년까지 이슬람 국가에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다. 에밀리는 부모가 40년 동안 이슬람 국가에서 사역한 성인 MK이다.

나는 그 장면을 스냅 사진처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아시아의 황회색 하늘이 독특한 냄새들과 무수한 차들이 뿜어내는 배기가스며 먼지, 소똥, 노점의 향긋한 야채튀김들로 무거워지고 있다. 그리고 귀청이 터질 듯한 버스의 경적소리, 인력거 끄는 소리, 영화음악이 뒤섞인다.

기숙학교에서 30마일 떨어진 도시에 나와 간만의 쇼핑을 하며 긴장이 풀려있는 16살 소녀들의 무리 속에 있는 그 즐거움이란... 그러다 문득 온갖 소란과 소음, 열기와 냄새 가운데 갑작스레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다. 지울 수 없는 순간이 내 마음속에 박힌다. 친구와 나는 복잡한 시장의 길모퉁이를 막 돌아서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자전거 하나가 갑자기 미끄러져 오고 자전거에 탄 남자가 히히덕거리며 손을 뻗쳐서 내 친구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연달아 꼬리를 무는 많은 기억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 일조차 기억해야하는지 당황스럽기도 하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였다. 별 일도 아닌 것을... 그런 일들은 이슬람 문화에서 백인여자로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일상 중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기에 그 장면이 내 마음에 그렇게도 모질게 박혀있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하다. 마치 이 장면은 나를 향해 “여길 봐, 보라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하며 손을 흔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멈추어 그 장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다른 장면들, 기억들, 행복했던 많은 순간들, 크고 작은 일들, 그 나라말이며, 옷감, 내 몸 속까지 남아있는 것 같은 그 특별한 맛, 내 삶을 채운 꽤 괜찮고, 미국적이지 않고, 근사한 TCK(Third Cultural Kid)로서의 생각과 느낌들을 떠올려본다. (그렇다. MK가 되는 게 뼛속까지 기쁘고, 다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쯤에서 나는 이 특별한 장면이 MK로서 누렸던 다른 기쁘고, 슬픈 장면들과 틀리게 만드는 한 가지를 보여주겠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다. 내 친구가 당한 그 희롱은 그 순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침묵 속에 덮여있다.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우리 둘이 잠깐이라도 멈춰 서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의 대화는 조심스럽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 둘 사이에는 이 날에 대해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침묵을 깨고

아마도 그 일을 한 장의 사진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앨범 속에 있는 여러 사진들 중의 한 장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앨범은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앨범이다. 이것은 이슬람 환경에서 백인, 서양인, 어리고 힘없는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하는 부끄러운 앨범이다.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진들, 그 모든 눈길, 버릇없는 제스처며 말투들, 건드려지고, 꼬집히고, 밀치고 야유 당한 것들의 사진이다. 사진들은 훼손되어 있고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거짓말로 얼룩져 있다. 여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놀랍게 지어지고, 하나님 눈에 기쁨이요, 그 마음의 즐거움인 여자!

그 침묵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말없이 체념과 부정을 말하고 있다. 그 침묵은 누가 말을 걸면 어깨를 움츠리고, 머리를 숙이고, 발로 먼지를 차낸다. 그러니 조금만 밀어보자. 말을 해 보라고 부추겨 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명백하게도 침묵은 부끄러움에 대한 깊은 느낌을 소리내고 있다. “여자인 것은 뭔가 잘못된 거야. 내가 나인 것은 뭔가 잘못된 거야. 이 남자들은 왜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게 하는 내 자신에게 오히려 뭔가 나쁜 점이 있는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자니 너무 창피한 걸...”

어쩌면 이 침묵은 또한 “그래서 뭐? 이런 일이야 너무 흔해서 얘기할 만한 것도 못 돼. 이건 별 일 아니야. 그래, 또 한 번 당한 거지 뭐. 이미 익숙하잖아. 무슨 큰일이라구... 별 일 아닌 거 가지고 야단법석 떨 이유가 없어” 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숙명적인 어투로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텐데. 하나님은 내 부모님을 모슬렘 나라로 부르셨어. 여성을 희롱하는 것은 문화적인 부분이고. 깨끗하게 정리될 수 없는 거라면 참아내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지도...

나는 가끔 침묵이라는 것이 “내가 뭔가 얘기하면, 그 일에 대해 잘못한 사람은 내가 될 거야. 괜히 말했다가 더 나빠질 수 있어. 어른들은 말씀하시겠지. ‘왜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않았니? 왜 그 사람이랑 눈을 마주친 거야? 너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살폈어야지. 밖에 나갈 때는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잖니? 도대체 너 뭐가 잘못된 거니?’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니면 침묵이란 변함 없는 사실을 간단하게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말을 해? 다른 중요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부모님은 너무 바쁘시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많이 지쳐있잖아. 문화충격을 겪느라, 언어공부 하느라... 게다가 여러 가지 사역에 대한 요구에 싸여 계시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걱정거리를 또 하나 안겨드려야 해?”

침묵은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좀 더 명확해졌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제야말로 이슬람 문화에서 어린 딸들을 키우는 우리들이 문화적 가치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어쩌며 그 사진들을 꺼내어 밝은 곳에서 찬찬히 살펴봐야 할 때일 지도 모른다. 우리 딸들이 성장하는 동안 이런 경멸과 성희롱이 계속된다면 먼 훗날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침묵하게 만드는 잘못된 인생가치들은 어떤 것인가?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고 사역하면서, 우리 딸들을 밝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게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짓을 걷어내고

우리가 해야할 가장 첫 번째 일은 이러한 침묵이 실제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 뒤에 있는 거짓과 잘못된 생각들을 드러내어 진실과 맞닥뜨리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몇 가지 거짓들이 있다.

“여자인 것에 뭔가 잘못이 있어. 나한테 뭔가 잘못이 있어.” 이러한 수치의 경험은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에서 자라는 여자아이들에게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다. 설사 아이가 사랑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다 하더라도 자기의 여성 정체성에 대해 거룩하지 못한 메시지들을 계속 접하게 되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다.

이는 두 단계에 걸쳐 나타난다. 우선,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되는 단계에서 일어난다.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성이란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슬람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적인 경전(‘하디스’라 불리움)은 여자들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타고날 때부터 불안정하고, 의지가 부족하고, 무능력하고 비논리적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가진 육체적 매력은 저항할 수 없는 위험한 함정과도 같아서 남자들은 이에 대해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다.

여자에 대한 이러한 메시지들은 우리 딸들이 자라나는 동안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때 심각한 혼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 뒤에서 걷는 여자들을 보게 된다. 베일을 쓰고 벽 뒤에 숨어 있는 여인들을 본다. 우리 아이들은 이슬람 여자친구들이 가족 식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음식을 받는다는 것을, 아파도 가장 마지막에 병원에 가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때는 얻어맞고 학대당하는 그들을 보게될지도 모른다. 여자아기가 태어나면 가족들이 아무 말 없이 실망하는 것도 보게 된다. 마음 속 깊이 우리 딸들은 여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이 더 복잡해지려면, 우리 딸들이 서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떠오르는 위성 매체들이 이슬람 세계에다 서구에 사는 소녀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 때때로 서구 소녀들이 TV 드라마에 나오는 소녀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는 서구여자를 보면 ‘딱 좋은 사냥감’으로 생각한다. 8, 9살 된 여자아이들조차 문화적으로 적절한 옷차림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야유를 받고 만짐과 꼬집힘을 당한다. 그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단지 흔히 벌어지는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에 의한 행동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우, 저기 웃기게 생긴 노란 머리 좀 봐. 파란 눈이 정말 이상하지 않니?” 와 같은 종류의 메세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희롱이 사실상 성적인 것임을 알아차린다. 얕잡아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넌 한심해. 이런 대우를 받는 게 마땅해.”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 MK들이 자신들을 경멸스럽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에 걸쳐있는 여러 나라에서 자란 20살부터 60살에 이르는 성인 MK들을 알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치과 인성에 대한 의심 때문에 말없이 괴로워하고 힘겨워하였다. 나는 적어도 그런 현상 중의 일부가 전혀 인식되거나 알아차려지지 못한 경멸과 성희롱의 세월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희롱은 미묘한 상황에서 매우 많이 발생하고, 또 자주 발생하기에 별 일이라 할 수 없고,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침묵, 그러나 철저히 거짓된 이러한 생각은 희롱이 너무나 상투적인 일이기에 이런 일을 겪으며 자라는 사람은 그냥 간단하게 익숙해져버리면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부적응이나 다름없다고 가정한다. 개미처럼, 또 열기나 먼지처럼 그것은 그 문화 안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적응방식이다. 더운 나라에서 오래 살수록 그 더위를 참는 법을 배우게 되듯 성희롱을 오랫동안 경험할수록 그에 대해 둔감해지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댄 알렌더(Dan Allender)는 그의 수작(秀作) ‘상처받은 마음’에서 이러한 아동기 성적학대에 관한 이슈들을 다루면서 어떤 종류이든 부적절한 성적접촉이나 상호작용은 아이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정적인 상호작용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될수록 장기적인 영향 또한 깊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유의 사건을 겪은 후 여자아이들이 때로 어른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반응 중 하나는 “그냥 무시해버리렴.”이다. 이런 반응 뒤에 놓인 메시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는 “맙소사, 그냥 그러려니 해. 아직까지 이 나라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단 말이니?”

또 다른 메시지는 이와 같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걸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있어도 되는 거야.” 이런 관점에서는 아이들이 갖는 두려움, 분노, 굴욕감은 그 아이에게 일어난 학대보다 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른에게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침묵, 외면당함에서 오는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입밖에 꺼낼 이유가 없어.” 그 아이가 이러한 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문화에서 MK로 자라는 여자아이는 숙명론의 수렁에서 희망을 향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느끼게 되는 숙명론은 두 가지 근본적인 생각에서 시작된다. 첫째, 이슬람의 신념체계에 깊이 박혀 있는 숙명론이 있다. 알라, 최고신이자 거룩한 신은 여자란 남자를 보조하도록 정했다. 이런 보조적인 지위는 신성한 결정이며, 창조물로서 본래 가치가 떨어지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 자라나는 MK에게는 성희롱이란 필연적이고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불평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운명인 거니까.

MK들이 경험하는 두 번째 타입의 숙명론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을 이 나라에 부르셨어. 이 나라 문화는 서양여자인 내가 가차없이 희롱 당하고 비굴해지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러니 내 자신의 안위라는 것은 세계 복음화 라는 하나님의 계획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이 나아지거나 바뀌도록 어떻게 해 보시라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없어...”

(* 이와 같은 문화적 숙명론의 싸움에서 어떻게 우리의 딸들을 준비시키며, 바르게 반응하도록 도울 수 있을 지에 대한 내용은 다음 호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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