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 20_04_파릇한 우정이 싹트는 홈스쿨링 미니학교
- 김마리아 선교사(동아시아 C국, HOPE)
- 2002년 1월 13일
- 5분 분량

사계절이 분명해서 더욱 아름다운 한국에서 네 계절을 한바퀴 구경하고 나니 벌써 선교지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키도 마음도 불쑥 커버린 동기와 이린이가 건강하고 밝게 지내고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사랑만으로도 잘 자라는 듯해서 다행이다.
아이들은 한국에 와서 거의 매일 밤마다, 함께 선교지에서 홈스쿨링을 했던 영이와 성이를 보고 싶어하면서 기도했다. 처음 현지에 도착해서 동갑내기 여자 친구가 없던 이린이가 선교지를 옮기면서 드디어 같은 또래의 친구 영이를 만났다. 적극적인 이린이와 수줍음을 잘 타는 영이는 함께 국제학교 유치원에 다녔다. 우리가 도착하던 해에는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님들이 국제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매 학기마다 학비가 인상되고, 또 선교사자녀에 대한 할인율도 일정하지가 않아 매번 등록하기 전에 옥신각신 긴장된 분위기를 맛보곤 했다. 계속되는 학교 재정난, 비기독교인 이사의 커진 목소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어려움, 이런 여러 갈등의 요소들 속에서 한국 부모들이 한국학교를 시작하자는 뜻을 모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사를 수급하고, 학교의 형태를 갖추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끼면서 계속 국제학교에 보내야 겠다는 분들도 있었고, 현지학교에 자녀를 보내야 되는 사정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불안정한 학교에 보내서 아이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입장들이 각자 정리되면서, 결국 우리 두 가정만 홈스쿨링식 미니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가정은 당장 안식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국 학교의 필요성이 더 절실했다.
국제학교에 그동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과 우리의 사정과 계획을 전했다. 그리고, 여름방학부터는 예비학교를 시작해서 1학년 1학기 과정을 복습하고, 문제집을 풀고, 일기 쓰기와 글짓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제 2학기부터는 이런 식으로 한국학교를 하면서 영어도 계속하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의견을 물었다. 아이들은 둘이 함께 공부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뜻에 따라주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어떤 식의 학교보다는 단짝 친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영이 어머니는 전직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어서 학업을 진행하는 과정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국제학교를 다니던 이린이와 영이를 위해 영어로 수업을 진행 해줄 봉사자인 미스 로렌과, 현지어를 가르쳐 줄 전직교사 출신의 선생님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일의 중요성과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두 가정이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고, 도우심을 바라며 하나 하나 진행해 나갔다. 도중에 마땅한 집이 쉽게 구해지질 않아서 애를 태우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집이 구해졌고, 필요한 물건들은 최대한 각자의 집에서 가져오고, 필요한 책상과 걸상만 구입을 했다.
어린 동기와 성이를 위해 유치원 과정도 진행하기로 했다. 여름에 왔던 단기 팀들과 후원 교회에서는 교과서와 문구류, 교재들을 보내주셨다. 음악과 미술을 지도해주실 독신 선생님들이 더 모여지면서, 진행은 더 활기를 띄었다. 여러 차례 의논을 통해 영어와, 현지어, 한글수업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시간표를 만들고, 토요일에는 주로 예능학습이나 체험학습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두 집에서 일주일씩 당번을 하면서 점심에는 따뜻한 밥을 준비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면 학교 문을 닫기도 했다. 최대한 학교 분위기가 나도록 교실을 꾸미고 태극기와 우리나라 지도도 큼지막한 것으로 비치했다.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 방에서는 유치원 수업이, 다른 방에서는 초등학교 수업이 진행되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여러 염려들이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물론 영어, 현지어, 즐거운 생활을 가르쳐 주시는 다른 선생님들도 계시지만-엄마가 하는 수업을 재미없어 하거나, 다른 아이들처럼 "국제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를 시작하고 나니 그것은 쓸데없는 노파심이고, 믿음 없는 걱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국제학교에 다닐 때 이린이가 매일 아침마다 하던 질문이 있었는데 "엄마 나 오늘 학교 안가면 안 돼?" 라는 것이다. 적응을 잘 하고 밝은 성격이던 이린이는 국제학교의 생활을 재미있어 하면서도 이 질문을 했었다. 나는 '아이가 아침이라(7시20분에 출발) 일어나기 싫어서 저러나 보다' 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아이가 다른 언어권에서 공부하면서 받고 있던 압박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준비했고, 작은 아이 동기도 내 자전거 뒤에 타고 학교 가기를 기다렸다. 토요일에 사정이 생겨 수업을 못하는 날이면, 학교에 가자고 둘 다 아우성이었다.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학교에 가고 싶어하고, 공부하고 싶어하게 하는 걸까? 한국에서 나서 한국에서 공부를 한 나는 이해가 될 듯 말 듯했다.
아무튼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공부했고, 특히 국어 쓰기에 많이 뒤쳐졌던 이린이가 읽기와 쓰기에 진보를 보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어 교제도 다른 분의 도움으로 국제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제를 구해서 공부했다. 내가 진행하는 유치원반도 너무 재미있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했었는데, 한국에서 보내주신 교재와 교육안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좋아하는 유치한(?) 내 성격 때문에 함께 웃고, 떠들며 아이들은 숫자와 한글을 배우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서양 선교사들은 월요일에 예배와 모임을 갖는데 그때는 그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을 위해서 월요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모임에 우리 이린이와 영이도 보냈다. 그분들도 홈스쿨링을 하는 분들이었기에 우리에게는 적잖은 도전이 되었다. 그래서 월요일 오후는 서양 아이들과 함께 예배도 드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들의 벼들도 무르익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토요일에 가까운 들에 가서 추수하는 모습, 탈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체험학습을 나갈 때는 다른 한국 가정들과 동행을 했다. 함께 학교는 못하지만 관심과 격려를 보여주신 분들이 있어서 한결 힘이 났다.
학기를 진행하면서 중간에 한 번 그리고 기말에 한 번 영어와 현지어, 한국교과 부분의 국어와 수학, 즐거운 생활에 대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으로 빈약하기는 했지만 생활기록부를 대신하기로 했다. 이런 유형의 홈스쿨링을 할 경우 부모들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학교 운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이 우리 가정과 영이네는 좋은 팀웍을 이룰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엄마대신 선생님으로 부르기로 한 약속도 아이들이 잘 지켜주었고, 엄마들도 학교에 갈 때는 교사답게 옷도 더 신경 쓰고, 서로 호칭도 사모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구를 이용한 체육활동이나, 단체활동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은 많은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비록 네 명이지만 함께 움직일 때는 줄을 세우고, 양치를 할 때도 차례를 지키게 하고, 분리수거 등의 현지에서 볼 수 없는 부분들을 학교에서라도 해 볼 수 있게 했다. 다양한 자료가 필요한 '즐거운 생활'은 자료를 다 구입할 수 없는 한계도 있었다. 또, 한국과 학제가 다르기 때문에 -1학기는 국제학교에서 유치원이었고, 2학기부터 한국 학교 형태로 전환했기 때문에- 학업 일수가 부족하게 되었다. 여러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비교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점도 조금은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갓 해온 따뜻한 점심밥을 먹으며 즐거웠고, 두 명에게 더 집중에서 수업을 했기 때문에 국어나 현지어, 영어 모두 더 깊게 배울 수 있었고, 뒤쳐진 부분들을 보충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를 정성어린 눈으로 봐주신 다른 선생님들의 객관적 의견도 들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며,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엄마들도 영어와 현지어 수업이 있는 날은 집에서 쉴 수도 있어서 생각보다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선교지에 와 있었지만 학교에서 만큼은 한국인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재정의 부분에서도 국제학교의 한 아이의 학비로 두 아이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영어권 선교사 자녀들의 모임인 월요학교에서 연극을 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마리아 역을 하는 영이와, 목동역을 하는 이린이가 자랑스러웠다. 손수 소품과 의상을 만들어온 월요학교 선생님의 정성에 더 감동이 되었다. 우리는 모든 분들께 작은 선물을 했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정말 첫 사역 중 제일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홈스쿨링을 하기 위해서는 헌신된 교사가 있어야 하고, 아이들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현지의 상황 때문에 반신반의하게 홈스쿨링을 시작했지만 국내에서 이 일을 책임지고 도와주며, 도서나 영상자료 등을 보내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 나와서 이린이와 함께 홈스쿨링을 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에 와서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 생활을 해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린이는 한국에 나와서 1학년 마치기 전 봄방학 할 즈음에 열흘 동안 학교에 다니고, 2학년부터는 자연스럽게 한국 친구들과 함께 올라갔는데, 학기초부터 회장후보에 오르더니, 2학기 때에는 부회장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상황에서 홈스쿨링은 학력인정, 교사수급, 교재구입 등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볼만한 도전이다. 이제 선교지로 돌아가면 지난번보다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홈스쿨링을 하게 된다. 부모들이 일치된 의견으로 일을 진행하고, 교사를 믿고 따른다면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 찬 아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선교지에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든 집에서 한국학교 과정을 도와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처럼 학년이 같고, 부모의 생각이 같다면 더욱 유리하다. 언제든 한국에 돌아와 어려움 없이 적응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선교지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더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