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 21_05_하루에 두번 학교가는 아이들
저는 알바니아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또 선교사로 살고 있는 김미숙 선교사입니다. 저희 큰 아이 은혜가 막 돌을 지나서 이곳으로 부임했는데, 은혜가 이제 10살이 되었고, 사역기간 중 얻은 막내 대영이가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현재 아이들은 한알학교(알바니아 한인 선교사 자녀학교)에 초등학교 3학년과 유치원에 각각 다니고 있습니다.
은혜의 경우, 알바니아 국제 선교사 자녀학교인 져라심 치리아지 학교(이하 GDQ)에서 오전에 공부를 하고, 방과후 학교(after school)제로 운영을 하고 있는 한알학교에서 오후에 한국식 교육을 겸하여 받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after school제도에서 교육받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선교사로 살면서 자녀교육으로 고민하는 모든 부모 선교사들과 정책을 연구하는 분들에게와 관심자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입니다.
알바니아는 역사적으로 오랜 이슬람 식민지와 공산주의로 저희가 이곳에 왔을 때에는 사립학교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도 없는 피폐한 상황이였습니다. 학교들의 건물은 낡고 창문의 유리는 거의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환경적으로 낙후했고, 이념의 붕괴로 교육이 나아갈 바를 잃어버린 상황에 교사들은 위축되고 학생들은 교육의 의미를 알지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저희 가족의 경우 큰 아이가 어리고 생존과 적응이라는 환경에서 자녀 교육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염두에 두지 못했으나 해가 거듭되면서 동료 선교사들과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 한국에서 복사해온 어린이 교육 비디오 테잎을 돌려가면서 보여주는 등의 자구책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은혜가 두 살 정도 되었을 때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토요일마다 아이들을 위해 유치원 프로그램을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진행하였던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름도 무지개 유치원이라고 짓고 사무실의 한켠에 교구도 들여놓고 한 선교사님의 가족이 헌물 해 준 어린이 교재를 사용하여 개원식도 하고 나름대로 유익한 도전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한 1년 정도 진행되던 무지개 유치원은 각 가정마다 정착시기가 지나고 사역들이 시작되어지면서 계속 진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는 비단 사역의 문제만이 아니고 저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서구 선교사들 중 일부가 이미 알바니아의 최초 복음전도자이자 교육자였던 '져라심 치리아즈'의 이름을 사용하여 제법 잘 갖추어진 선교사 자녀학교를 유치원과정부터 8학년까지 운영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자라서 입학허가 연령이 되어 자연스레 정규적인 교육을 하면서도 일반적인 국제학교보다 비용도 적게드는 GDQ학교를 가게되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국에서 단기로 유치원 교사선교사가 여름에 방학을 이용해 오셔서 몇 주 동안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여주었고 간간히 오는 손님들이 아이들의 언어 영역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어린이 사역을 하는 선교사께서 단기간이지만 아이들에게 성경학교를 운영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97년도 3월에 알바니아의 내전으로 불가피하게 한국 으로 일시 철수를 했었는데 그 당시 목동 GMTC 유치원에서 은혜를 잘 돌보아주시어 예상치 못했던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저와 아이들은 아빠가 먼저 귀환한 알바니아로 다시 입국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다른 선교사님들이 없었지요. 그렇게 수개월을 안전 문제로 긴장가운데 지나면서 98년 초에는 재 입국 선교사님들과 함께 새롭게 도착하신 선교사님들까지 모두 합쳐서 다섯 가정으로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은혜는 GDQ 입학연령이 되면서 유치원 과정에 입학을 하였고 9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저희 가정의 안식년 전 까지 1년을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영어권 교육을 하고 있는 GDQ학교에서 적응되어가면서 가정에서만 붙들고 있던 한국교육(단지 언어 영역을 넘어서)에 대한 필요의 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한알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98년 초부터 시작되어 99년 봄에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안식년을 은혜의 학령기 바로 전 해에 갖게되어 귀국 후 은혜는 반년정도 선교 유치원에 들어갔고 그 당시까지도 글자를 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수도 적고 늦은 편이였죠. 그런데 한국생활 2-3개월이 지나면서 은혜가 어느 순간 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최소한 글을 떼었으니 저희로서는 참 감사했어요. 유치원과 함께 학습지도 함께 해 나가면서 은혜의 한국어 어휘를 늘리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은혜가 입학할 때 즈음, 걱정도 많았고 은혜를 잘 이해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저희가 알바니아로 들어가기 전 담임선생님에게 인사를 갔었습니다. 학기초에 가족상황에 대해 자세히 써서 내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이 저희 가정에 대해 잘 아시는 줄 알았는데 그 날 저희 부부를 만나 보시고 선교사임을 알았고 은혜를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선생님은 은혜를 대하면서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아이라 생각하여 부모님을 만나려고 생각했었다고 하시면서, 은혜의 한국어(이는 비단 언어를 넘어서 한국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교과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의 언어행동들에 준비가 않된 이유)이해 부족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시고 은혜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음에 미안하다고 하셨지요.
아이가 엄마에게 표현은 잘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한국인으로서 더 잘살아가도록 교과 과정을 선별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서구식의 교육 방법이 아이들에게 부담을 많이 주지 않으면서도 학습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전통적인(주입식) 한국교육을 받았던 저로서는 계속적으로 아이들이 서구식 교육을 받도록 하려는 마음이 있었었지만 그러나 한국의 교육이 갖는 장점과 학습 능력을 넘어선 그 이상의 정서와 문화를 교육하는 것이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교육을 받게될 아이에게 좋은 기틀이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서면서 일단 GDQ교육보다 한알학교에서 진행하는 한국교과과정에 충실하기로 결정을 하였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저 개인적으로 한국식 교과과정이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기본적인 정체감을 갖게 하는 것에 주요한 매체가 된다고 믿고 있고 은혜의 경우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태어나 6개월 그리고 수년이 지나 안식년으로 1년을 도합 1년 6개월을 한국을 경험하였고 막내 대영이는 터키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알바니아에서 보내고 있어서 적어도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간접경험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또래 한국 친구들의 관심이나 공부의 진도와 방법 등을 잘 경험할 수 있겠다는 이유에서 한알학교는 이와 같은 요구를 채우기에 참으로 적절한 대안이고 축복 이였습니다.
98년도에 접어들면서 백인숙 선생님을 통해 수원기독초등학교 에 대한 소개를 안식년을 마치고 오신 선교사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에겐 좋은 소식이었지요. 당시 GMP 선교부는 현지 체재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연스레 리더들의 모임에서 다루어진 의제를 해당 학부모들과 상의하고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당 당사자들이 주축 이 된 학부모위원회가 결성되도록 했습니다. 사이사이 MK nest의 백인숙 선생님이 중재 역할을 해주시면서 한알학교의 준비에 대한 의사소통과 역할을 분담하였습니다.
학교형태는 그 당시까지 아이들이 GDQ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여러 의견 중에 좁혀진 것은 , GDQ학교에 속해서 아이들이 한국교육을 받는 경우 그리고 완전히 독립해서 한국학교 건물을 따로 하는 경우..를 주제로 의견이 백 선생님과 수원기독초등학교 측과 오고 갔는데 GDQ 학교에서 수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수월하지 않았고(당시 GDQ에서는 영어를 하는 한인 교사가 파송 되면 학교 내에 한인들을 위한 일종의 트랙을 만드는 것을 제안했고 이러한 점이 우리측에서는 여의치가 못했습니다)결국 한국학교는 독립된 체재로 운영을 해야 했습니다. 한국 학교는 시작하는 부분에서 몇가지 미래에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지속될 수 있다는 보증이 없어 상호간의 믿음이 필요했고 파송 교사들의 임기가 2년이여서 아이들을 완전히 한국 학교만의 교육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2년 후 교사 파송이 중단된다면 아이들은 다시금 국제 선교사 자녀학교로 돌아가야하는데 2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들에게 영어에 대한 부담을 많이 안겨주고 중등 교육을 앞에 둔 아이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 문제가 커서 결국 GDQ에서 오전에 기존의 방식데로 수업을 하고 중식이후 1시에 한알학교로 이동하여 수업을 4시 30분까지 하는 방과후 학교제(after school)로 결정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에는 MK-NEST와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그리고 GDQ 이사회의 전적인 이해와 협조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위 의 기관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많은 이해를 가지고 학부모들과 해당 학생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려는 열심과 친절로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실제로 한알학교가 성립된 가장 주요한 배경에는 교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기독교육의 큰 비전을 가지고 헌신한 수원기독초등학교가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기꺼이 교사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었고 아낌 없는 지원을 해준 것과 그 중간에서 선교 현장과 한국의 사정을 잊는 MK-NEST의 수고와 중재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알학교는 초기 교사 수급이 이미 결정이 되어 이루어졌고 유치원 과정에는 GMP에서 단기 선교사를 주선 파송해 주었습니다. 유치원 교사의 경우 비교적 후보자가 있어서 첫 교사의 임기후 공백을 지속적으로 메울 수 잇었는데 이는 GMP선교부의 홈 페이지와 오리엔테이션 교육중에 헌신자가 나온 결과 입니다.
교사 사례라는 표현보다는, 학부모들이 주축이 된 학교 운영회 에서 감사의 마음의 표현으로 매달 일정한 금액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나오셔서 숙소나 생활비는 다른 선교사들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올해부터 그리스에 있는 주한대사관에서 보조금이 나와서 교사들을 위해 사용 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은혜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 3학년으로 다니는 시기입니다. 작년까지는 저희가 아이를 한알학교만 등교하게 하였죠. 그 이유는 아이가 한글을 좀더 정확히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었습니다.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알학교는 학사 운영에 있어서 GDQ학교의 학사일정에 영향을 받더군요. after school이 갖는 일종의 약점과 같이 학교운영에 국제 선교사자녀학교의 영향권 안에서 수업 일정을 조정해야하고 아이가 학교이동과 두 학교에서 적응하고 학습을 감당해야함에 많이 피곤해하는 점이 있더군요. 반면에 한알학교는 공간적으로 한국아이들만의 자리가 있다보니 좀더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어요. 교육자체도 국어, 수학 등을 넘어서 요즈음 한국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찬양을 배우고 한국 전통 놀이이자 한국에 있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놀이들 예를 들면 제기차기, 연 날리기, 공기놀이, 고무줄, 윳놀이 등과 함께 한국 명절에 맞춘 음식 만들기 단소 불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전인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선생님들이 초기에 가까운 현지 학교 운동장에서 베드맨트, 공놀이..등 체육수업을 진행하려 하셨지만, 하다보면 100여명정도의 현지 아이들이 원숭이보듯 둘러서서 지켜본다고 하시면서 계속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그래서 중단을 했지요. 주택가에 있다보니 주위 이웃들에게도 신경이 많이 쓰여서 혹여라도 불평이 나오면 수업을 진행할 때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경우도 있구요. 은혜가 두 학교를 다니다 보니 많이 피곤해 보일때가 많아요. 은혜도 올해부터 GDQ학교를 다니는데, 이것을 결정하면서 제일 많이 기도한 것은 은혜의 체력이었어요. 그러므로 향후 한알학교는 기존의 선교사 자녀학교와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해 합의점을 찾아서 건물과 공간을 공유하고 교사들이 학사일정을 공유할 수 있을지 논의된다면 더 낳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는 거의 대안이 없는 상태입니다. 주위 국가에 기숙사로 운영되는 몇 개의 학교가 있지만 입학조건도 까다롭고 인원도 제한적이고 먼저 아이를 떨어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안이 있겠지만 먼저는 한국 내에서 교회와 기독 학교 혹은 기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선교사 부모들도 적극적으로 현지에 알맞은 방법들을 찾고 대화하면서 실험하는 도전이 필요하겠지요.
일단,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한 학교가 알바니아 선교사들을 위해 준비하였던 것은 그 학교를 통해 주님께서 예비하셨던 축복이라 믿습니다.
한알학교와 같은 after school제도는 경험한 바에 의하면 믿음으로 그 발걸음을 내어딪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의 영어교육에 대한 부담을 나름데로 가지고 있어서 가능하면 국제 선교사 자녀학교를 선호하는데 한국 교과로 운영되는 이러한 학교는 교사수급의 불투명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하는 불안과 아이들의 체력적 부담 그리고 제한된 환경과 시간과 이중적 부담을 가지고서라도 드러나는 성과와 교육적 효과 아이들의 변화와 계속적으로 고민하는 정체감의 문제와 모국과의 괴리를 좁히는데 큰 몫을 담당한다고 믿습니다.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 가운데 처음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어요. " 아이를 한국어 중심으로 양육할 것인지? 아니면 외국어 중심으로 양육 하실지에 대해 부모님들이 정확한 의견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은혜와 대영이가 한국인의 정체감을 갖는 국제적인 아이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지금 현재 은혜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영어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동안은 한알학교에 집중해서 지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적응도가 빠른데 담당 교사의 수고와 베려와 함께 아이가 한글에 대한 개념이 비교적 정확한 것이 영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아울러 저는 은혜와 대영이가 남들에 비에 무언가 좀 늦게 간다는 마음이 들고 부족함이 느껴진다 해도 한국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소망을 갖습니다, 제 자녀에 대해 부모인 저희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그리고 한알학교를 통해 경험했지만 참으로 한알학교와 관계된 많은 분들이 선교사 자녀를 위해 실제적으로 준비하시고 혜택을 주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분들의 함께 함이 저에게는 큰 격려와 신뢰가 되었습니다. 이 분야 역시 마치 저희가 선교지로 나오면서 가졌던 헌신이 필요한 일입니다.